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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가락오광대 발상지
낙동강을 중심으로 서쪽은 오광대라 부르고 동쪽은 들놀음[野遊]으로 불렀다.
강서구 가락동에도 예부터 전승되어 오는 '가락오광대'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연희가 중단되었다가 1983년에야 김해문화원에 의해 발굴 복원된다. 1989년 김해군 관할이던 가락면이 부산 강서구에 편입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락동은 1989년 행정 구역이 변경되기 이전에 경상남도 김해군 가락면이었다.
우선 김해문화원 중심으로 활동하는 가락오광대의 명칭을 '김해가락오광대'로 바꾼다. 2001년 가락사람이 '가락오광대보존회'를 새롭게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전화위복이랄까 마을사람들은 애써 예부터 마을에서 전승되는 투박한 가락을 으뜸가락으로 음악을 구성하였고 마을사람들이 쓰는 언어(탯말)를 대사로 삼았다.
강서구 가락동 죽림마을은 이곳 사람들이 죽림강이라 일컫는 서낙동강의 서쪽 오봉산 기슭 강안에 자리 잡는 죽림리의 본 마을이다.
옛날 오봉산이 하나의 섬이었을 때 대밭이 무성하여 큰 홍수라도 나면 이 섬이 바다 위에 떠 있는 대섬[竹島]처럼 보였다고 죽림(竹林)이라 이름 붙여졌단다.
죽림포구는 1970~80년대 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포구였다. 장날이면 어김없이 가락오광대도 중[老長]놀음·노름꾼·양반·영노·할미영감·사자무과장 등 6과장을 걸쭉하게 한판 펼쳤다.
가락오광대(駕洛五廣大)는 1890년경 경상남도 김해군 가락면(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락동) 죽림 나룻터에서 음력정월 대보름 밤에 연희되던 탈놀음을 가락오광대라고 한다. 가락오광대는 민속 가면극으로 파계승의 풍자, 양반에 대한 조롱, 처첩간의 갈등 등을 주제로 삼고 있다.
1930년경부터 일본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으로 점점 쇠퇴되다가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재현되기도 하였으나 갑자기 몰아닥친 서구문화에 우리고유전통문화가 천대, 외면당하면서 활성화 되지 못했다. 이에 가락동에서는 2001년 가락오광대 보존회를 발족하여 재현하고 있으며, 완벽한 복원과 보존 그리고 지속적으로 승계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현재 통영오광대(중요무형문화재6호), 고성오광대(중요무형문화재7호), 동래야류(중요무형문화재18호), 수영야류(중요무형문화재43호)가 중요무형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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