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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만덕사지/당간지주
만덕사는 1351년 고려 충정와 3년에(동래 온천동에서 구포로 넘어가는) 만덕고개의 서쪽 산중턱헤서 창건되었다.
옛 절터를 보면 대규모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의 개국공신 노강필(盧康弼)과 이엄(李嚴)이 927년(고려 태조 10)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따르면, 1352년(고려 공민왕 1) 충혜왕의 서자 석기(釋器)가 이 절에 유폐되었다.
당시 공민왕은 원나라가 쇠약해지자 원나라 세력을 쫓아내고 원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원나라와 친한 세력이 석기를 왕으로 세우려고 음모를 꾸몄으며, 이를 안 공민왕은 그 세력을 없애고 석기를 이 절로 귀양보냈던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고려가 망한 뒤 왕손들이 이 절로 피난했으나, 태조 이성계의 박해가 심해지자 성씨를 여러 가지로 바꿔서 거제도와 합천 등지로 흩어졌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명대사 유정(惟政)은 이 절에 승군을 모으고 왜군과 유격전을 벌였다. 일본에 전하는 《조선정벌기(朝鮮征罰記)》에 따르면, 승군들의 저항이 매우 심해서 침략한 지 2년이 지난 1594년(선조 27)에야 점령되었다. 이러한 사실 이외에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1986년에 금산(金山)이 가건물을 지어 오늘에 이른다.
대가람이었던 만큼 유물이 많이 전한다. 특히 부산광역시립박물관이 벌인 1972년과 1990년말 발굴조사에서 삼층석탑·당간지주·국장생석표·석주·금당터 등 다양한 유물과 유적이 발굴되었다. 이 중 삼층석탑은 1972년 주변에 흩어진 탑재를 모아 복원한 것으로, 현재 부산광역시립박물관으로 이전되어 서 있다.
당간지주는 석주 2주 중 1주만 남아 있다. 높이 3.5m로 기단부는 파손되었으며 당간을 설치하던 간대(竿臺)는 석주 아래에 놓여 있다.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다.
1990년 조사 때 확인된 금당터는 동서 68m, 남북 54m, 높이 4m의 직사각형 축대이다. 이 축대 뒤편과 동북쪽, 서북쪽 등지에도 건물이 세워졌던 흔적이 조사된 바 있다. 당간지주가 금당터에서 약 150m 아래에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 만덕1동 일대 대부분이 만덕사 경내에 속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95년 6월에는 산신지위(山神之位)라고 새겨진 돌이 발굴되었으며, 인근에 흐르는 덕천천 너머 산등성이에서는 거대한 암석을 타원형으로 파낸 돌절구가 조사되었다. 이 대형 돌절구를 부근 마을에서는 예로부터 ‘만덕사떡구시’라고 불러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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