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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기선생 기념전시관과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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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번주소
지번주소 : (46936) 부산시 사상구 모라동 115
도로명주소 : 부산 사상구 모라로192번길 200
도로명주소
컨텐츠명 동산 김형기선생 기념전시관
홈페이지 정보없음
이용시간 화~금:AM10:30~PM16:00/토~15:00
휴무일자 월.일요일
주차공간 가능
상세문의 051-312-8318
관리자명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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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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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동산 김형기선생 기념전시관

 


 

사상구 모라동 백양산 자락에 있는 김녕 김씨 유두 문중 재실 그곳에는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동산(東山) 김형기 선생의 기념전시관과 추모비가 있다.

 

1896년 현재의 부산시 사상구 삼락동 인근인 유두리(당시 주소는 양산군 좌이면)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난 동산 김형기 선생은 사상역 앞에 있었던 사립명진학교를 졸업한 뒤 동래고보를 거처 경성의전에 입학하게 된다. 그의 독립운동 내력은 1919년 3.1운동 때부터 본격화됐다.

 

경성의학전문학교 4학년으로 재경유학생회 회장을 맡고 있던 그는 민족대표 33인과 연결, 학생들을 규합하게 됐고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시위대를 이끌다 현장에서 일경에 연행됐다.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1년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다. 풀려난 뒤 학교를 어렵게 졸업 후 울산과 기장을 거처 부산으로 귀향, 지금의 중구 영주동에 있던 3층 목조건물을 빌려 동산병원이라는 간판을 내건 뒤 그 수입으로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며 부산. 경남지역 독립운동가 들의 거점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해방 후 대중신문을 약 1년 6개월간 발행하기도 한 그는 애타게 그리던 광복 후 이데올로기의 회오리에 휩싸이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친일세력이 해방 후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민족주의자들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해 나갔고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 그를 북한의 김두봉과 외사촌간이라는 터무니 없는 이유를 붙여 연행, 그 후 생사를 알 수 없었다고 유족들은 전하고 있다. 당시 함께 연행됐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부산지역의 항일 독립운동가인 소정(蘇庭) 최천택(崔天澤)선생이 이후 "빨갱이임을 자백하라고 강요당하던 동산이 잔혹한 고문에 못 이겨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다"고 그의 자서전에 기록하여 동산의 마지막을 증언해 주고 있다.

 

이 같은 동산의 항일투쟁 사실은 불과 20여년 전 우연히 발굴되었다. 지난 89년께 서울에 살고 있는 동산의 증손녀(당시 20세)가 독립기념관에서 자신과 같은 본적을 가진 독립투사 이름을 발견하면서 부터 발굴되기 시작했다.

 

동산 선생이 3.1운동 주도했다는 이야기는 집안사람들에게만 전해오던 이야기였다. 해방직후 이데올로기 분쟁의 와중에서 행방불명됐고 독립운동 내력을 입증할 자료가 없어 유족들은 그들의 가슴에만 동산 선생을 담아 놓고 있었다. 손자들이 독립기념관에서 `김형기'란 이름을 발견한 이야기는 종친회에 알려졌고, 이후 종친회는 독립기념관 전시물인 3.1운동 관련자 기소문이란 사실을 알게 됐으며, 정부기록보관소에서 동산 김형기 선생이 피고인 1번으로 형을 선고받은 `판결문'까지 찾아냈으며, 동산 김형기 선생은 이 자료 덕택에 지난 1990년 비로소 건국유공자 애족장을 받게 됐다.

 


 

 

• 추모비 :

포악한 왜적이 우리 강토를 강점하여 국토를 유린하며 식민통치를 자행한지 십여년 각계각층의 민족 지도자와 재경 유학생이 주축이 되어 대한 독립의 횃불을 높이 드니 청사에 길이 빛날 3.1 독립운동이다.
 
이 3.1 운동을 주도하신 최고 지도자의 한분인 동산(東山) 김형기(金炯機)선생이시니 이곳 김녕 김씨 (金寧金氏)유두(柳頭) 문중 유헌재(柳軒齋) 앞뜰에 청석을 세워 선생의 위대한 행적의 일단을 새겨두고 우러러 보고자 한다.
 
선생의 본관은 김녕(金寧) 이며 호는 동산(東山) 으로 대보공(大輔公)휘(諱)알지(閼智)를 시조로 하며 고려조(高麗朝)에 금주군(金州君)을 훈봉 받으신 휘(諱)시흥(試興)이신 문열공(文烈公)이 관조(寬祖)이시다. 문열공(文烈公)의 9세손으로 세조 조(世祖 朝)에 단종(端宗) 복위를 주도하고 순절하신 사육신 충의공(忠毅公)휘(諱) 문기(文起) 백촌(白村) 선생의 현손(玄孫)으로 정란(靖亂)의박해를 피하여 부산(釜山)의 유두(柳頭)에 이거(移居)하신 유헌(柳軒) 휘(諱)영필(永弼)공의 13세손이다.
 
선생께서는 서기1896년8월9일 선조의 세거지인 당시 동래군 사상면 유두리 231번지2에서 출생하였으며 충주 지씨 (池氏)부염(富廉)님을 부인으로 맞아 슬하에 장남 재진(在珍)등 2남6녀를 두셨으며 효심이 지극 하셨고 형제간의 우애 또한 각별하신 분이셨다.
 
선생이 경성의전(京城醫專)4학년에 재학중 당시 유일한 학생조직인 재경 유학생회 회장으로 계시면서 1919년 1월 민족대표 33인으 한분이신 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과 함께 협심하여 해외독립운동에 대한 정세와 민족자결주의 사상을 고취 시키면서 만세시위운동에 대한 계획을 재 경성의학 전문학교 대표인 주종선(朱鍾宣)(李公厚)김문벽(金文壁) 등과 같이수립하셨다. 


동월 28일 정동교회에서 강기덕(姜基德)한창식(韓昌植)과 회합하여"  조선 독립선언서"를 지역 대표 및 학교 대표에게 배포함으로써 서울은 물론 전국 방방곡곡에 조선 독립만세 소리가 노도와 같이 번지게 하였으니 실로 독립운동사에길이 빛날 위업을 이루셨다
 
3.1일 탑동 파고다 공원 앞에 모인 수천의 시위군중 앞에서 민족대표를 대신하여 학생 대표로 선생께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셨다고 전하나 확인 할 길이 없어 더 없이 애석한일이다. 이 날의 시위로 주동자인 선생을 비롯하여 학생대표37명이 일경에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을 받고 동년 11월 6일 주동자 중 최고형을 받아 옥고를 치르셨다. 위의 사실을 종합해 보면 3.1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한 핵심 인물 중 한분이 재경 유학생회 회장 동산(東山)김형기(金炯機)선생님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상구 모라동 백양산 자락에 있는 김녕 김씨 유두 문중 재실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동산 김형기 선생의 기념 전시관이 있다.

 

전시관에서는 동산 김형기 선생을 비롯한 사상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사진과 독립선언문, 신문, 책자 등의 자료를 전시하고 있으며, 청소년과 주민들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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