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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감천동 고인돌
감천하당(당산)에 있는 고인돌로 B.C 3~4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인돌이다. 이 고인돌이 있어 감천동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근거가 되고 있다.
감천은 부족사회의 권력자가 살았던 지역으로 추측되며, 고인돌(支石墓)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소도(蘇塗)와 같은 신역(神域 : 聖域)으로 추측된다. 감천동은 천마산(天馬山), 장군산(將軍山), 금티산(金峙山)이 병풍처럼 우뚝 솟아 있고, 감천항을 두송반도(頭松半島)가 길게 뻗어 내려 감천만(甘川灣)이 깊숙이 들어가 천연의 항구가 된 마을이다.
따라서 선사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에 가장 알맞은 입지 조건을 갖추었으며, 고인돌 6기(基)의 발견은 청동기 시대에 사람들이 살았었고, 부족사회의 권력자가 이곳에서 지배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고인돌은 남방식(南方式) 고인돌이 2기, 변형적 고인돌이 3기, 표석식(標石式)의 것으로 추측되는 것이 1기 등으로 종류가 다양해 시대적인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보여져 감천에 고인돌이 영위된 청동기 시대가 퍽 길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부터 삼천년 전쯤부터 북쪽에서 들어 온 청동기 문화는 앞서 신석기 시대에 이곳 주민이 바다에 가까운 곳에 살았던 것과는 달리 산비탈에 살며, 땅 위에 집을 짓고 취락을 이루어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벼도 재배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청동기 문화를 지니고 있던 사람들이 철기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농업의 생산력이 급속하게 발전하여 부족 국가가 곳곳에 생겼다.
감천동의 고인돌은 위와 같은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며, 제1~3호는 부산화력 발전소 사택촌 앞 도로를 따라 있었다. 제1호에서는 마제석검(磨製石劍) 1점이 출토되어 현재 부산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제2, 3호는 도로공사를 하던 중기(重機)에 밀려 파괴되었고, 상석(上石)은 도로 밑에 묻혀 버렸고, 출토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제4호 역시 구도(舊道) 서쪽 밭 가운데 있었으며, 마을에서 옛날부터「복(福)바위」라고 불렀고, 이 바위를 건드리면 복이 나간다는 전설 때문에 잘 보존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공장을 세우게 되어서 발굴 조사되었으나, 유물은 없었다. 제5호는 해변 서북쪽의 산기슭에 산에서 흘러내린 흙에 묻혀 上石만 보였었는데, 택지 조성으로 파괴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2단병식(二段柄式) 마제석검(磨製石劍) 1점이 채집되었다. 이 석검도 부산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제6호는 현재 버드나무집 식당(食堂)의 뜰에 있으며, 지주(地主)가 잘 보호하고 있다. 완전한 형태의 남방식(南方式) 고인돌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그 유래 등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조사가 되지 않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단 하나뿐인 고인돌은 마을 주민을 비롯하여 부산시민 모두가 잘 보존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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